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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 희망이 되어 돌아온 김치

  • 작성자세계김치연구소
  • 작성일시2023.04.11 11:19
  • 분류2022
  • 조회수262
내가 어린 시절 우리집의 가장 큰 행사는 명절이나 제사가 아닌, 김장이었다. 처마 밑에 서리가 내릴 때쯤이면 어머니는 전국 팔도에 흩어져 사는 친척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 김장에 대한 수요를 조사했다. 수요조사가 끝나고 D-day가 정해지면 아버지의 형제들부터 사촌들까지 족히 50명에 가까운 친척들이 각양각색의 김치통을 들고 우리집으로 모였다.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땅에서 배추, 고추, 무 등을 재배했던 부모님은 손수 키운 농산물로 김치를 담갔다. 1박2일에 걸쳐 약 1500포기의 김치를 담그는 우리집 김장은 거의 전쟁을 방불케 했다. 그래도 김장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친척들이 많아 매년 부모님이 준비하는 배추의 양은 줄지 않았다. 김치 나누는 걸 큰 기쁨으로 생각한 부모님과 달리 난 김장을 할 때가 되면 늘 뾰로통해 있었다. 사촌들과 오랜만에 만나는 것은 좋았지만, 김장을 담그는 내내 잔심부름을 해야 했기에 김장날이 썩 달갑지는 않았던 것이다. 

항상 김장은 어머니의 진두지휘 아래 널찍한 마당에서 커다란 함지박 가득히 배추를 절이는 것으로 시작됐다. 남자들은 배추와 무를 손질하고, 여자들은 파와 마늘 등을 깠다. 오랜 시간 함께 김장을 담가와서인지 어른들은 별다른 조율 없이도 손발이 척척 잘 맞았다. 덕분에 그 많은 작업들이 아무 혼란 없이 순차적으로 잘 진행될 수 있었다. 나와 사촌들은 어른들 틈바구니에서 크고 작은 심부름들을 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였다. 어른들은 밤늦게까지 돌아가면서 절인 배추를 뒤집었고, 이른 새벽이 되면 팔을 걷어붙이고 앉아 웃고 떠들며 배추를 씻었다. 마당 한쪽에는 아궁이가 자리하고 있어 쌀쌀한 새벽 공기를 훈훈하게 덥혀주었다. 

날이 밝아오면 본격적으로 김장이 시작됐다. 절인 배추에서 물이 다 빠질 때쯤에는 모두가 빙 둘러앉아 양념을 섞었다. 자연스럽게 온 가족의 웃음과 수다도 양념 속에 버무려졌다. 김치 양념이 완성되면 어머니는 가장 안쪽의 어린 배춧잎을 똑똑 끊어 양념에 살짝 묻혀 내 입에 넣어주었는데, 그 맛은 김장날의 고단함을 싹 다 잊게 할 만큼 달콤했다. 우리집 김치의 특징은 어떤 재료든 아끼지 않고 팍팍 넣는 데에 있었다. 부모님은 김장김치에 조금이라도 재료가 적게 들어가면 모두의 1년 김치농사를 송두리째 망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마당 한편에 성벽처럼 켜켜이 쌓인 절인 배추들을 배추소 넣는 엄마들 앞으로 나르는 게 나와 사촌들에게 주어진 그날의 임무였다. 모든 준비를 끝마치고 나면 아이들은 배추를 나르고, 엄마들은 배추소를 넣고, 아빠들은 김치를 차곡차곡 통에 담아 김장김치를 완성했다. 김장날은 모처럼 일가친척이 모두 모여 화합을 다지고 마음을 나누는 날이기도 했다. 김장이 마무리되어갈 때쯤이면 어머니는 아궁이 솥에 수육을 삶아 막걸리와 함께 내왔다. 수육의 양은 모인 사람 수만큼이나 어마어마했다. 

우리는 마당에 둘러앉아 김치와 함께 수육을 먹었는데,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수육은 갓 담근 김치와 궁합이 너무 잘 맞았다. 막걸리를 마시며 서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는 친척 어른들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활짝 피어나곤 했다. 김장김치가 가져다주는 든든함은 다시금 한해가 훌쩍 지나갔다는 쓸쓸함과 허무함도 이겨내는 것 같았다. 어머니는 친척들의 차에 두둑해진 김치통을 실어 보내고 나서야 가장 중요한 일을 끝마친 듯 한시름을 놓았다. 형이 고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부모님은 우리 형제의 교육을 위해 밭을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우리집이 서울에 올라온 후로도 김장은 계속되었다. 이전처럼 농산물을 직접 재배하는 게 아니어서 찾아오는 인원은 줄었지만, 여전히 김장날이 되면 30명에 육박하는 사람들이 우리집에 모였다. 특히 고향에 있는 지인들이 갖가지 김장 재료들을 보내줬던 덕분에 큰 부담 없이 김장을 준비할 수 있었다. 당시 아버지는 서울에서 조그맣게 사업을 시작했었다. 처음엔 그럭저럭 벌이가 잘돼 남부럽지 않게 살기도 했지만,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됐을 때쯤엔 여러모로 사업이 어려워져 결국 부도가 나고 말았다. 대학입시를 치른 후에는 입학금을 마련하기 힘들만큼 가정형편이 어려워져 대학진학 대신 취업을 해야 하나 고민을 하고 있었다. 

뜻하지 않았던 곳에서 돌파구가 생겼다. 그해 김장날, 김장을 끝마친 친척들이 어쩐 일인지 나를 따로 불러냈다. 그리곤 저마다 두툼한 봉투를 꺼내 내 손에 쥐어주었다. 극구 사양하는 내게 친척 어른들은 “우리가 너희집에서 김장을 담가서 같은 김치를 먹고 산 게 벌써 20년이야. 이럴 때는 우리도 있는 힘껏 도와야지. 어려울 때일수록 포기하지 말고 힘을 내야한다.”고 힘을 실어주었다. 

친척들이 주고 간 돈은 등록금을 무려 세 번이나 낼 수 있을 만큼 넉넉했다. 친척들의 도움으로 나는 무사히 대학교에 진학을 했고,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대학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았던 부모님의 김치가 나에게 희망이 되어 돌아왔다. 어린 시절엔 몰랐지만, 우리집의 김장날은 서로가 정을 나누는 날이었고 우리집 김치는 온 가족을 하나로 묶는 소통의 마중물이었다. 

작품소개

내가 어린 시절 우리집의 가장 큰 행사는 명절이나 제사가 아닌, 김장이었다. 김장날이 전해지면 아버지의 형제들부터 사촌들까지 족히 50명에 가까운 친척들이 각양각색의 김치통을 들고 우리집으로 모였다. 어린 시절엔 몰랐지만, 우리집의 김장날은 서로가 정을 나누는 날이었고 우리집 김치는 온 가족을 하나로 묶는 소통의 마중물이었다우리 가족을 하나로 모아 주었던 김장날의 추억, 힘들었던 시기에 희망이 되어 돌아온 김치의 고마움을 글로 남기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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